주세 2010.05.18 17:17 전체공개

편지

얼마 전에 고래동무 구좌를 하나 추가했다. 원래 선물은<<B급 좌파>>였는데 이번에<<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로 바뀌었단다. 당초 선물을 바라고 구좌를 추가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책을 주는 것도 몰랐는데 그 덕에 나는<<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두 권이나 갖게 됐다. 김규항님의 신간이 나왔다길래 사야지 하고 있다가 눈에 띄길래 바로 샀는데 곧 그 다음 날 선물이 온 것이다. 좋은 책을 두 권이나 갖게 되서 하나는 자랑 삼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줬다.
어제 밤부터 지금까지 열 여섯시간 동안 동대문에 나가서 한숨도 안자고 옷장사를 했다. 새벽에 손님이 없어 미리 갖고 간<<가장..>>을 읽었다. 역시나 김규항님의 글은 '나'를 많이 돌아보게 한다. 머리 속을 휘젓는 생각들 때문에 피곤함도 모른채 김규항님께 편지를 썼다. 옷 무더기 속에 쭈그려 앉아 절박한(?) 마음으로 연습장에 휘갈겨 쓴 편지 내용은 결국 "도와 달라."는 거였다.
도와줘? 뭘??
대한민국이 썩었다고 하지만 부자들에겐 이만한 나라는 없다고 한다. 나는 부자가 아니지만 우리 집은 객관적으로 부자다. 일반 샐러리맨들이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수십억 빚이 쌓여있지만, 그 빚이 '적정히 유지될 만큼' 부자다. 웃긴 건, 평생을 빚더미에 시달렸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우리 가족은 중산층 가정 이상의 풍요로운 삶을 누려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사치스러운 사람은 없다(상대적인 것이지만 내가 즐겨 입는 봄 자켓은 만 오천원짜리다).
부자긴 한데 사람들이 말하는 호화스러운 삶을 누려보지 못한 나는, 대신 부자라서 겪을 수 있는 추악한 일은 있는 대로 겪었다(그리고 겪고 있다).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고 행복의 충분조건이 절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했고 내 나름대로 성과를 이뤘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변한 건 없었다. "가치관의 전복"이야 말로 진정한 회개라는 걸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왜 실천하지 못했나?
결국 핑계에 불과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의 문제가 내게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무일푼으로 상경해서 없는 자의 설움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김규항님은 그런 사람 중에 도가 지나칠 정도로 돈에 집착하는 사람을 두고 "졸부"라고 말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영락없는 졸부다. 특히 우리 어머니는 돈이 당신의 삶 자체인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58년에 태어난 섬마을 바보 같은 소녀는 어른이 되도록 오로지 부모 말 잘 들으며 사는 게 길이라고 여겼다. 그 시절, 여자애는 국민 학교만 나오면 된다는 통념대로 어머니를 중학교에 진학 시키지 않았고, 어머니는 밤낮으로 농사일을 도우며 효녀 노릇을 했다. 그렇게 나이가 차고 이웃 섬 마을에 살던 아버지를 만나 서울로 올라왔는데 무일푼 거지인 처지라 형제도 모른 채하며 어디 하나 반겨주는 곳 없었다. 아이 낳고 미역국 한 번 못 먹은 설움에, 남편 빚보증은 분유 값도 빼앗아가고, 쪽방 구석에서 한 발자국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단다. 방문이 열리면 빚쟁일까 싶어 가슴이 철철 내려 앉아 이불만 뒤집어쓰길 여러 달이었다. 어미가 먹질 못하니 젖먹이 아이도 얼굴이 노랗게 질려서 울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죽기 살기로 보따리 장사하고 날 새기로 몇 년을 발품 팔아 일궈낸 장삿길이 그 유명한 평화시장 옷 장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남부럽지 않을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대개 졸부들이 그렇듯 모은 돈으로 건물을 사고 이것저것 사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 불행은 겹겹이 몰려 왔고 사기에, 실패에 빚은 수십억으로 늘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빠져든 것이다.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자고, 그래도 남들보다는 잘 살 수 있다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그건 평생을 "죽기 살기로" 돈 버는데 전력투구한 어머니께는 차라리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지식도, 교양도, 어떤 명예나 권력도 없는 어머니에게 '그냥 다 포기하고 제발 편하게 살자.'는 말은 당신 인생 전부를 부정하라는 말이었다.
과욕의 결과라는 건 알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당신의 선택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욕심의 목적은 언제나 자식인 나와 우리 가족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공포 속에서 말 그대로 무지한 개인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살아오셨다는 건 사실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행복이란 게 뭔지 따지며 물어보는 자식에게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왜 자기한테 그런 걸 물어보냐며 서럽게 울던 어머니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김규항님의 글을 처음 읽은 지 벌써 8년째가 되간다. 다 자란 성인에게는 안쓰러운(?) 일이겠지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견을 거부하거나 부정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글은 일방적인 것이라 그동안 아주 많은 오해와 왜곡들이 있었음에도 그런 것들이 '진실'은 아니라는 걸 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불편함을 느끼고 반성하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러면서 내가 많이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고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닌 부르주아의 자식이다. 이런 글조차 결국에는 '가장 반동적인 인간의 자기 위안'일지 모른다는 걸 항상 생각한다. '불쌍하고 가련한 졸부'의 자식은 태어날 적부터 '졸부의 가치관'으로 자랐고 골수까지 졸부의 말이 스며들어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 세상에 친구고 가족이고 형제고 다 필요 없다. 내가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인간 취급을 받는다."는 위협적인 말을 생생한 체험담과 함께 들으며 자란 내가 회개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이 행복의 절대 조건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아니 어쩌면 우리 집안의 불행이 '돈' 때문이라고까지 생각하지만 나는 이미 그 끔찍한 돈의 굴레를 어머니와 함께 짊어지고 있다. 아무리 ‘졸부의 욕심’때문이라지만 벼랑 끝에서 허우적대는 - 그동안 모은 재산을 은행 빚으로 다 날리고 싶어 하지 않는 - 어머니를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군대를 전역하면 그동안 모은 돈으로 곧장 태국으로 날아가 무에타이를 배워 선수 생활을 하겠다던 꿈은 이미 한 켠에 접었다... 나는 낮에는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어머니가 주인인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는 일상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어느 순간 어떤 불행으로 인해 그동안에 모아 온 것들이 사라질지 몰라 전전 긍긍하며 그토록 좋아하는 축구도, 그림도, 여행도 못하며 팍팍한 삶을 살아간다. 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렇게 내 나이 30이 가까워질수록, 80년대 여느 운동권들이 그랬듯 '올바르고 멋진 삶'을 살고자 했던 내 바람도 기한 만료가 되는 게 아닐까.
편지는 결국 다 쓰지 못하고 어느 구석에 쳐 넣었다. 지금이라도 맞붙잡고 하나하나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결정은 내 몫 일 테니... 다만 김규항님의 글은 계속 읽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반동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로만 떠벌리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남보다 더 가진 사람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부채감과 불행함, 어리석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늘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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