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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분열된 제국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적어도 서구 역사에 콘스탄티누스가 미친 막대한 영향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272년)의 로마는 약 3백 년 전 로마 제국이 세워질 때의 로마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제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5현제 시대’를 지나 약 50년 간 18명의 황제가 쿠데타와 암살을 반복하며 잇달아 나타나고 사라져가는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기가 왔다. 이처럼 정치가 혼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 경제력과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외적으로는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내우외환에 빠져들었다.
3세기에 들어서며 아우렐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걸출한 황제가 잇달아 나타나며 이런 혼란은 일단 진정된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방대한 제국을 넷으로 나눔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와 일리리아, 갈리아, 에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서(西)로마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지역을 동(東)로마로 나누어 각각의 정제(正帝,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게 하고, 동서 로마는 다시 한 사람씩의 부제(副帝,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독립 영역을 가짐으로써 네 사람의 황제와 네 개의 제국이 분립된 것이다.
그것은 로마가 겪고 있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회심의 조치였다. 일단 제국의 국경은 너무나 길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은 너무도 많았으므로, 한 사람의 황제가 중앙에서 동시에 대응하기는 무리라고 여겨져 네 사람의 황제가 각기 맡은 쪽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도록 했다. 또한 본래는 중앙에서 파견된 ‘점령군’이었던 로마 군단이 세월이 지나며 파견된 지역에 뿌리를 내려 토착화되고, 머나먼 중앙과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졌으므로 더 이상 로마에 앉아서 여러 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점도 고려되었다. 5현제 시대까지 팽창과 집중화를 계속했던 로마는 이제 분산과 분열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치제(四分治制)는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여, 갈리아와 이집트의 대반란이 평정되고 페르시아에게도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 사분치제는 한 가지 뚜렷한 모순을 안고 있었다. 네 사람의 황제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느 한 황제가 다른 황제의 지배영역을 탐낸다면?
콘스탄티누스는 사분치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콘스탄티우스 부제(서로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바로 사분치제의 모순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서로마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보내져 사실상의 인질이 된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이 개혁적인 황제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는데, 다만 그가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추진했던 기독교 박해만은 공감하지 못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에게서 받은 영향도 있었고(아들이 황제가 된 후,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가서 이른바 ‘예수가 못박혔던 진짜 십자가’를 발견한다), 당시는 이미 제국의 하층민뿐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이 속속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미 힘을 잃은 옛 종교에 매달리는 일은 현명치 못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타고난 승리자’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인품, 외모, 체력, 키’ 모든 면에서 남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그를 최고의 영웅으로 묘사한 유세비우스의 말인 만큼 덜어서 들어야 할지 모르지만, 이미 청년기에 그의 명성은 로마에 자자했던 것 같다. 특히 훤칠하게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는데, 누구도 그를 감히 ‘패배자’로 낮춰볼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승리자로 살았다.
이 ‘타고난 승리자’로서의 운명이 태동되던 때는 305년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이 이룩한 사분치제가 권력투쟁으로 엉망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옥좌를 내놓고 물러난 것이다. 그러자 그가 동로마 정제로 추대한 막시미아누스도 할 수 없이 물러났으며, 두 부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정제로 올라섰다. 그런데 이 때 갈레리우스의 니코메디아 궁전에 머물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음모에 휘말릴까 두려워 야반도주하여 불로뉴에 있던 아버지에게 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부자는 픽트 족을 정벌하고자 브리타니아로 건너가는데,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가 병사한다(306). 그러자 그곳의 군대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정제가 되었다고 선언하는데, 동로마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세베루스를 정제로 인정했으며,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서로마 부제의 지위만 인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에 바로 반발하지 않고 부제 시절 아버지의 영역이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며 외침과 반란에 훌륭히 대응하여 명성을 쌓아갔다. 그 사이에 갈레리우스는 위기를 맞이했는데, 앞서 퇴위했던 동로마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퇴위를 번복하고는 아들 막센티우스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와 혼인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고 갈레리우스에게 맞섰다. 하지만 동방의 힘은 만만치 않았고, 힘겨루기가 계속되다가 308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재로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아누스가 모두 은퇴하고 세베루스의 죽음으로 비어 있던 서로마 정제에는 막시미아누스의 친구인 리키니우스를 임명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막센티우스는 이 합의를 거부하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계속 지배했으며,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의탁해 살다가 310년에 엉뚱하게 반란을 일으키고는 자살해 버린다. 리키니우스 역시 죽은 갈레리우스 대신 동방을 맡으며 동로마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대결하면서 사분치제는 완전히 걸레쪽이 되고, 제국은 대혼란에 빠져든다. 이 때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센티우스를 치기 위해 로마로 진격한다(312).
콘스탄티누스는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니발과 달리 그는 로마 시를 목표로 삼았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점령한 도시에서 일체 약탈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민심을 얻으며 진군했다. 마침내 그와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이 312년 10월 28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때 콘스탄티누스는 “정오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이겨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세비우스의 창작 내지 뜬소문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벌어진 전투는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이로써 그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영광은 짧고, 영향은 길다
다음은 동방이었다. 한때 콘스탄티누스와 손을 잡았던 리키니우스가 얼마 후 그를 적대시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기다렸다는 듯 314년에 그를 공격하여 트라키아를 제외한 모든 동로마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323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켜 리키니우스를 격파했다. 리키니우스는 항복한 뒤 일단 사면 받았으나 몇 달 뒤 결국 처형되었다. 이로써 로마 전역을 평정한(324)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 동안 “정복자이며 최고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며, 로마 제국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우선 막센티우스를 꺾은 직후인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수백 년 동안 탄압받아온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그 문구를 보면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
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지 기독교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칙령의 수혜자는 기독교인이었다. 또 콘스탄티누스는 그동안 국가가 몰수했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으며, 사비를 털어서 교회를 신축하는 데 보탰다. 또한 그는 멜키아데스 교황에게 자기 소유의 라테란 궁전을 기증했으며 그것은 이후 천 년 동안 ‘교황청’의 기능을 맡았다. 나중에 여기서 착안하여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 전체를 교황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의<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라는 문서가 위조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위조임이 폭로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의 조언에 따라 노예의 사적 처벌 금지법(319), 죄수 학대 금지법(320)을 제정했으며, 321년에는 처음으로 일요일을 휴일로 삼았다(이는 사실 기독교와 전통적인 태양신 숭배의 절충이었다).
그리고 325년에는 ‘니케아공회의’를 개최하여 당시 기독교 세계의 최대 논쟁이었던 ‘아리우스파 논쟁’, 즉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신성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처럼 그가 기독교를 부흥시킨 까닭은 자신의 끊임없는 행운이 신의 가호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도, 로마를 통합시키는 데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통 종교보다 기독교가 적합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사제들에게 “신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황제권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후 기독교 군주들이 왕권의 근거로 들게 되는 ‘왕권신수설’의 원조는 콘스탄티누스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친기독교적 정책은 아직도 전통 종교의 뿌리가 깊은 로마 시에서는 많은 반발을 가져왔다. 여기에 계속해서 쇠퇴하던 서방에 비해 동방의 풍요로움을 집중적으로 개발할 필요성이 더하여, 콘스탄티누스는 330년에 본래 리키니우스의 본거지였던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곳은 ‘새로운 로마’로 불리다가, 곧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점점 아시아의 전제군주를 닮아갔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이 “신이 보낸 사람”이라기보다 “신 그 자신”이라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죽음이 닥쳐오자 그는 황제복을 벗고 성직자의 흰 옷을 입었으며, 미뤄 오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37년 5월 22일, 황금 관에 넣어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관 주위에는 예수의 12사도의 관(성유물로 채워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열세 번째 사도”의 위치에 놓은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영광은 찬란했으나, 그 영광에는 그림자도 따랐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넘어서까지 영광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잦은 정략 결혼으로 복잡한 가족관계를 형성했다. 자신이 죽인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 황후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다른 황비에게서 얻은 아들 크리스푸스를 죽였으며, 얼마 후에는 파우스타 역시 죽였는데 역사가들은 대체로 간통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또 방대한 제국을 혼자 힘으로 다스리기란 역시 힘겨웠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으므로, 세 아들과 두 조카에게 부제의 지위를 주어 통치를 분담시켰다. 이는 그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속에 제국이 사분오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기독교를 다시 박해하는 등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을 송두리째 부정했다.
그러나 그가 제국에 가져온 두 가지 변화, 기독교 공인과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는 오랫동안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중심을 동방에 빼앗긴 서로마는 급속하게 기울어 갔으며, 결국 150년 정도 뒤에 멸망해 버린다. 하지만 유럽 전체에 주어진 기독교의 세례는 로마를 정복한 ‘야만인’들에게도 이어져,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천 몇 백 년을 두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네이버 캐스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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