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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님의 싸이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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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른 손에, 가랑비에, 입 맞추리

외할머니댁은 마당이 반듯하고 대청마루가 시원하고 뒤켠 우물이 맑고 깊었다. 돌담은 낮지 않았지만 높지도 않아서 정다웠고 반질반질 잘 손질된 대문은 늘 열려 있어서 이웃의 왕래가 자유로웠다. 뒷문 곁엔 실한 감나무가 있었고 뒷문을 열고 나가면 자그마한 오솔길, 그 오솔길을 따라 아카시아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해 4월 경부터 난 외할머니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딱 세살 반인 나이였다. 엄마가 많이 편찮으셨다. 한살 반 동생은 편찮으신 엄마가 옆에 끼고 있었고 나는 외할머니댁으로 보내졌었다. 태생이 까무잡잡한 나는 시골에선 제일 하얀 축에 속했다. 엄마 한복천으로 재단한 색색별 멜빵 치마를 날마다 갈아입으며 도시에서 온 티를 내고 다녔다. 날씨는 금새 더워졌고 엄마의 공단 한복천은 땀을 흡수하기에 영 마땅치가 않았다. 난 어느새 시골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 복장과 피부빛을 지니게 되었다. 장난감은 없었고 우리들은 심심했으니 놀 터전과 상대는 자연이었다.
얕지 않는 개울에서 멱을 감는 아이들은 학교 다니는 오빠들이었고 내 또래 조무래기들은 논에 물을 대는 수로에서 옹기종기 놀았다. 가재도 많았고 거머리도 많았다. 아무리 시골 아이들 틈에 섞여 있었어도 난 여전히 가재나 거머리를 무서워했다. 사실 가재나 거머리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으니 마을에 사는 상이군인이었다. 6.25 전쟁에 참전했음이 분명했을 그 아저씨는 손에 갈고리를 달고 다리 한쪽이 짧아 목발을 짚고 다녔다. 씨족 마을이었으니 다들 가족 형태로 살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만은 딸린 가족이 없었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억양도 타지의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 마을에 흘러들어왔는지는 따로 물어본 적이 없어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갈고리 손이나 절름발은 나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쟁은 그의 지능에도 영향을 끼쳤던지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려대도 그는 늘 아이들 주위를 맴돌았다. 어른들은 그에게 마을 소일거리들을 맡기지 않았고 대신 동정밥을 주었다. 어디 잔치 자리에서 한잔 걸칠 수 있는 날이라도 있을라치면 벌겋게 된 얼굴로 갈고리와 목발을 흔들어대며 다녔는데 아이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기겁을 했었다. 더운 날에도 그는 늘 남루하고 두터운 군복을 입고 있었다. 1977년, '휴전'엔 휴지보다 전쟁의 의미가 더 크게 남아있던 시기였다.
그는 밥을 동냥하지 않았지만 외할머니는 그를 극진히 챙겼다. 된장에 고봉밥을 먹는 그의 갈고리는 능란했고 입가와 눈가엔 누구라도 알아볼 고마움이 가득했다. 나의 외할머니는 키가 크고 마르셨다. 그가 밥을 먹고 있을 때 나에겐 당신의 마른 손으로 호박씨를 까서 먹이고 계셨다. (그러고보니 살이 없고 마른 나의 손은 외할머니 것을 닮았다.) 그가 밥먹은 그릇에 우물물로 입을 헹굴 때 쯤이면 곁에 있던 나도 포만감이 느껴져 괜히 졸음이 왔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나를 업으셨고 마당가에 정갈히 가꾸어놓으신 꽃밭을 따라 걸으며 당신의 마른 등에서 나를 잠들게 하셨다.
외할머니의 피부가 그렇게 썩게 될 줄, 내 어찌 알았으랴. 장면은 외할머니가 이부자리에 누워계시고 막내 외삼촌과 이모가 번갈아가며 외할머니를 이리저리 돌려눕게 하고 있다. (욕창이었다.) 여름의 기운이 성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방문 한지가 눅눅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외삼촌과 이모가 당신들의 어머니를 이리저리 들썩 들썩 옮겨드리면 외할머니는 가는 신음 소리를 내셨다. 한낮의 열기가 가라앉고 이름 모를 벌레 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외할머니를 곤하게 잠들게 했다. 그제서야 당신도 한숨 돌릴 기회가 생긴 외삼촌은 잠못드는 나를 마당으로 데리고 내려와 내 이름 석자를 크게 써놓고는 말더듬는 버릇을 잡아주곤 하셨다. 그해 여름, 나는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내 안에서 생겨나오는 생각들을 따라올만한 단어의 수는 모자라는 동시에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서 생각과 표현 사이에서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너무 많아서 모조리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던 밤이었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난 잠을 들 수가 없었고 내 이름을 쓴 작은 꼬챙이를 잡고 있던 외삼촌도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렇게 문단이 쓱 바뀐 것 처럼, 갑자기, 쓱, 돌아가셨다. 사람들이 외할머니 염을 했다. 있는 구멍을 죄다 막고 천으로 꽁꽁 묶었다. 여전히 가지런히 쪽을 진 외할머니는 주무시는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외할머니의 콧구멍을 귓구멍을 꽁꽁 막았다. 난 방 한구석에서 가만히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저것이 죽음이란 말인가. 나에겐 어떤 명확한 개념이 찾아오지 않았고, 개념이 없으니 현실도 아니었다.
꽃상여의 뒤를 따랐다. 구슬픈 상여가가 고개고개로 이어졌다. 외할머니가 저렇게 곱고 예쁜 상여에 누워계시다니, 나는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땅에 큰 구덩이가 파여졌고 외할머니의 관이 서서히 내려갔다. 흙이 관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봉곳한 무덤이 생겼다.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한참 후에도 집안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외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외할머니댁에선 매일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올라왔고 수육이 삶아지는 냄새와 함께 시큼한 탁주 냄새가 풍겨왔다. 손님이 어느 정도 잦아졌을 무렵, 드디어 엄마가 외할머니 댁에 걸음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아침부터 동구밖에 나가 기다렸다. 저기 멀리서 엄마가 오고 있었다. 몸을 추스린 엄마는 어린 내가 봐도 무척 헬쓱해보였는데, 휘청휘청하는 엄마는 양손에 선물 꾸러미를 한아름 들고 계셨다. 엄마 보다 더 멀리서 아빠가 동생을 안고 시간을 지체하듯 걸어오고 계셨다. 엄마를 보자마자 난 한달음에 뛰어가 엄마를 안았다. 너무너무 보고싶었던 엄마라 숨이 막 차올랐다. 오랫만에 본 엄마에게 뭔가 대단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 없이도 몇달을 잘 지낸 딸, 뭔가 큰 변화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 말이, "엄마!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돌아가셔서 땅에 묻었어!"
외할머니의 내복이 들어있던 선물 꾸러미를 그 길로 내팽겨치고 휘청휘청 엄마는 당신의 친정 마당에 쓰러지듯 달려와 엉엉, 엉엉, 우셨다. 엉엉, 우셨다. 외할머니 염을 할 때도 안울었고, 꽃 상여 뒤를 따를 때도 안울었고, 삼우재 할 때도 안울었던 나는 엄마를 크게 울리고 나서야 엉엉, 엉엉, 목놓아 울었다. 엄마에게 너무나 미안했고, 그때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한 개념이 찾아왔다. 현실이 되었다. 나와 엄마 곁에 아무도 가까이 못했고 멀찌기 서서 바라보던 모든 이들이 울었다. 하늘에선 가랑비가 내렸다. 말랐던 마당에서 풀풀 먼지가 일어나더니 금새 촉촉해졌다. 가랑비도 울음도 끝이 날 줄 몰랐다.
끝날 줄 모르던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몇달간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꺼이꺼이 어이어이' 곡을 하며 놀았다. 엄마를 위로해야했고, 외할머니와 이별을 해야했다. 나는 무엇이든 그리고 모든 것을 그리워해야했다.
*
벌초를 위해 동생네가 엄마를 찾아왔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러고보니 곧 있으면 추석이다. 타국에 살다보니 추석이라도 설이라도 감흥없이 지내는데, 알고보면 참 불효막심이다. 대소사가 아니더라도 "엄마, 좋은 공연이 있으니 함께 가요" 할 수도 있고 "엄마, 다이애나가 할머니한테 준다고 그림 그려놨어요. 가지고 갈께요," 할 수도 있고 "엄마, 남편이 이번 주말에 가까운데 같이 여행이라도 가자네요. 시간 비워놓으세요." 할 수도 있는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 중 단 한 가지도 못하고 사니 이런 못되먹은 불효도 없다. 그러니 대소사라해서 어디 생색낼 수 있겠는가. 실질적 거리는 맨숭맨숭한 마음을 만들어놓아 '기일'이나 '벌초'를 생경히 들리게 하니, 나에게 연결된 끈은 어느새 희미해졌는가...
장례의 문화가 그 옛날 것과 많이 달라졌고 명절을 치르는 풍습 또한 많이 달라졌다해도 나는 분명 거기서 와서 여기에 있음인데, 고백컨데 나에겐 이러한 풍습이 해마다 생경해져간다. 풍습의 생경함은 내 후세에 이르면 상이함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그런다 한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이또한 솔직한 마음이다. 풍습을 함유하는 문화는 내 피부와 실제적으로 와 닿으면 '의식'할 필요성을 못느끼게 되지만 그것과 동떨어진 거리를 두게 될 땐, 다시 말해 내 피부를 건드리지 않게 될 땐, '의식'의 기회가 그 거리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의식'은 문화의 시초를 보게 하고 풍습의 이유를 알게 하니 종국엔 동떨어진 거리가 '이해'로 포용됨을 경험하긴 하지만, 이는 생각에서나 가능한 포용이다. 현실은 그저 못되먹은 불효일 뿐이다. (이것은 좁히지 못하는 거리이기도하다.)
엄마의 목소리가 가을 풀처럼 말라있었다. 아니면 가랑비처럼 젖어있었던가. 동생네가 와서 잠깐 들뜬 목소리를 들려주셨지만, 당신의 목소리는 가을 풀이거나 가랑비. 그리고 풀 밑에 놓여있을 아빠, 가랑비에 젖어있을 아빠. 벌초는, 오늘 행해진다.
*
딸아이가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이루마의<Kiss the Rain>을 친 적이 있다. 어제 천둥번개를 동반한 날씨 뒤에, 그리고 엄마와의 통화 뒤에,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다시 이 곡을 쳤었다. 놀랍게도 딸아이는 이 곡의 멜로디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이 살그머니 녹화해둔 영상을 보니 비에 뽀뽀하는 모습으로 내가 치는 피아노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아... 아이는 날 위로하고, 멀리 있는 할머니를 위로하고, 먼저 가신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급기야 나의 외할머니께까지 안부를 전한다. 잔잔한 멜로디가 잔잔히 가슴에 남는다.<Kiss the Rain>의 비는, 가랑비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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