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윤 2010.08.22 22:49 전체공개

[고구려] 고구려성, 만리장성으로 둔갑하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우는 중국의 만리장성.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명대 만리장성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쉬떠밍 ㅣ 국가 측량국 국장 :
CCTV2 '2009.9.25' 뉴스자료 국가문물국 '명 장성 연장' 선포제가 국가측량국과 국가 문물국을 대표해 명대 장성의 길이 등 중요사항을 공표하겠습니다.
명대 장성의 길이는 8851.8km입니다.
새롭게 선포한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은 압록강번의 동산시 호산성이다. 호산성은 기존의 동단기점인 산해관에서 약 2000km 동쪽에 위치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명대 만리장성은 압록강까지 이르게 된다. 국내학계는 즉시 반발했다.
서영수 교수 ㅣ 단국대학교 :
고구려성을 바꿔가지고 이것이 중국식 성으로 보여지기 위한 것이죠.
그 결과 고구려는 물론이고 만주족의 우리 문화는 사라지게 되어있죠.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이것은 고구려사 빼앗기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도 관련되는 일입니다.
명나라 시대 만리장성이 압록강변 호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중국. 세운 만리장성은 고구려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만리장성. 세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문화유산이다. 바로 이곳에 있는 우리도 즐겨찾고는 한다. 지난해 돌연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압록강변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만리장성이 우리 고대사에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북경에서 73km 떨어져있는 모전곡장성. 옛 모습과 흡사하게 보존되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 돌과 전돌을 이용해 쌓았다. 석축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구운 벽돌인 전돌로 쌓아지었다. 장성의 중간 중간 위치한 공심돈루. 소단위 전투를 지휘하는 일종의 전투초소다.
안으로 들어사자 뻥뚫린 내부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평소에는 여러 방향으로 적을 감시하고 긴급상황에는 침입해오는 적과 맞붙어 전투를 벌이며 교란시키기 위한 구조로 되어있다. 돈루에서 적을 발견하면 곧바로 신호체계가 작동된다. 일종의 통신시설인 봉화대, 연기나 횃불을 밝혀 위험을 알렸다. 정상에는 이런 통신시설과 감시시설이 지휘통제 아래 일정간격으로 배치되어있다. 이들은 성벽을 따라 이어져 장성의 방어체계를 완성한다.
중국의 서북방변 지역에 위치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기점인 감숙성 가욕관. 내성과 외성 이중 구조의 성벽 높이가 10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가욕관 내성의 성벽은 흙으로 쌓았다. 초기 만리장성 또한 그랬다. 최초의 만리장성은 전국시대의 진나라, 초나라, 연나라 등이 흉노 등 북방민족을 막기위해 쌓기 시작했다.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의 성은 대부분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다. 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견고함을 보강했다. 만리장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명나라때다. 북방으로 쫓겨난 원나라의 몽골 세력을 막기위해 연산산맥을 따라 기존의 성곽을 잇고 강화하면서 장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명대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알려져 온 하북성 산해관. 만리장성 동쪽 끝에서 만나는 최초의 관문이라는 뜻에서 천하제일관이라 불리었다. 전돌을 쌓아 만든 성곽의 높이는 14m 넓이는 7m에 이른다. 산해관의 남쪽 끝은 발해만과 맞닿는다.
성벽을 지키던 적대에는 이곳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됨을 알리는 글이 새겨져있다. 하지만 작년부터 이곳의 위치는 흔들리고 있다.
요령성 TV 뉴스 2009.9.25 :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이 요령성의 압록강가에 있는 호산으로 정해졌습니다.
국가장성학회는 명장성의 동쪽 기점이 요령성의 호산이고 서쪽 기점은 감숙성 가욕관으로 정해졌습니다.
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 아니라 호산이라면 명대 만리장성은 2551.8km가 늘어나 8851.8km에 이른다. 중국인들은 어떻게 알고있을까?
Q. 산해관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인가요?
A. 동쪽의 시작점입니다. 천하제일관입니다.
Q. 산해관이 장성의 제일 끝부분인가요?
A. 아니에요. 가장 끝부분이 아니라 시작점이에요.
Q. 동단의 기점이라고요?
A. 맞아요.
Q. 그런데 호산을 동쪽의 기점이라고 하잖아요?
A. 호산? 너희들 호산이라고 들어봤어? 없어요. 모르겠어요.
신의주가 마주보이는 압록강변 단동시. 압록강변을 따라 15km를 따라 달리면 문제의 호산산성이 나타난다. 압록강과 에하가 합류하는 위치에 있는 호산.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태라 해서 호산이라 부른다. 입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만리장성의 동쪽 끝임을 알리는 대형 표지판이다. 새로 세운 관문은 기존의 동단기점인 산해관과 흡사하다.
성의 공식명칭은 호산장성. 단동시는 이곳이 만리장성의 시작점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표식도 설치되어있다. 관광객도 늘었다.
한국관광객을 의식해서인지 한국어 표시판도 따로 해두고 있다. 성벽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져있다. 중국은 이 일대에서 명나라때 만리장성의 옛터를 발견하고 그 위에 성을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성이 들어선 구간은 1.2km, 앞으로도 복원공사를 계속할 예정이다. 성은 몇번을 쉬어가야할만큼 경사가 급하다. 의외로 험한지형이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 헌데 제작진은 신축한 성벽과 엇갈린 방향으로 눈에 띈 흔적을 발견했다.
돌을 가지런히 정리한 흔적, 동서로 띄엄띄엄 이어져있다. 흙을 거둬내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돌을 정교하게 짜맞추어 쌓은 성이었다. 석축은 남고 윗부분은 무너져내린 상황. 높이가 상당해보였다. 적어도 6,7m는 되보였다. 무너져내린 성벽 아래에는 빠져나온 듯한 돌이 흩어져있다. 고구려성에서만 볼 수 있는 마치 옥수수알처럼 앞은 볼록하고 뒤는 뾰족한 쐐기돌이었다. 성벽은 이 쐐기모양의 돌을 품자형태로 쌓아지었다.
쐐기돌을 이용해 성을 쌓는 것은 전형적인 고구려양식이다. 고구려인들은 쐐기돌을 6합쌓기로 쌓았고 반대면에 돌을 맞물려 성을 완성했다. 그의 반해 중국인들은 흙을 다져 속을 채우고 벽돌로 지지대를 쌓아 성을 완성했다. 두 성은 충격에 대한 강도가 달랐다.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고구려의 성곽 특징은 토성, 그리고 석성, 혼축성 세가지로 분류하는데요.
그런데 전반적으로 석성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흙으로 만들고 명나라 이후에는 벽돌성이 많아지게 되죠.
고구려와 명나라의 성곽 차이를 말한다면 고구려는 돌로 성을 만들고
중국은 흙이나 벽돌로 만든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죠.
호산에서 발견한 고구려 성벽은 중국이 신축한 남북방향의 성벽과 직각으로 교차해있었다. 이 성은 어디까지 이어졌던 것일까? 중국이 펴낸 약식 발굴 보고서에 관련사실이 기록되어있다. 보고서는 고구려성이 호산을 둘러싸고 있고 명대 장성이 中자 형태로 이를 관통했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성은 호산전체를 감쌀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중국이 남북방향으로 신축한 장성의 성벽에 눌려있다. 명대 만리장성의 새로운 동단기점으로 지목된 호산산성. 그곳에 고구려가 묻혀있다.
중국은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압록강변 호산에 만리장성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만리장성의 석축을 발견했고 그 위에 새롭게 성을 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신축한 성벽 아래에는 또 하나의 고구려식 석축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 석축의 정체는 무엇일까?
1990년 호산에서는 중국 역사상 보기 힘든 유적이 발굴되었다. 호산에 고구려 성벽 아랫쪽에 얼핏 봐서는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제법 큰 구덩이가 있었다. 구덩이 입구는 흙으로 매워진 상태. 그것은 직경 4.4m, 깊이는 6m에 이르는 대형 우물이었다. 벽면은 성벽돌과 똑같은 형태의 돌로 지어져있었다. 고구려 성에서 보이는 품자 쌓기 구조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성을 쌓듯 돌을 품자형으로 쌓아 만든 대형 우물. 그것은 병사들과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우물의 규모로 보아 성 안에 주둔했던 인원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근에 위치한 고구려 성산산성. 이곳에도 유사한 시설이 있다. 물을 가둬두는 수뢰. 폭 5m 높이 6m 길이 60m의 긴 탱크형태로 품자 쌓기로 쌓았다. 석축을 쌓고 진흙을 발라서 물을 가두는 방식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성에서는 거의 다 보인다. 하지만 중국은 호산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지웠다.
만리장성 동단기점을 기념해 만들어진 호산장성 박물관에는 이곳과 관계없는 한나라 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고구려의 쐐기돌은 명대 만리장성의 기초석으로 둔갑했다. 우물 조차 중국의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고구려에 대한 단 한마디 언급도 없는 설명문. 그런데 이 안내문에 호산의 박작성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박작성은 어디일까? 구당서에 박작성이 등장한다. 박장성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고구려의 성이었다.
648년 3만여명의 당군이 산동반도의 내주를 출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쳐들어왔다. 당은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이 쉽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박작성은 산에 쌓은 험준한 요새이고 압록강에 둘러쌓여 견고했다. 공격해도 함락 시킬 수 없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박작성이 호산에 위치한 고구려성인 것일까? 산위에 올라 기록을 확인해보았다.
호산의 정상. 가파른 절벽은 능선을 이루며 마치 성벽처럼 자연요새를 구축하고 있다. 산 아래로 흐르는 압록강과 애하. 그것은 천해의 방어막이었다.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고구려의 수도인 궁내성은 압록강 중위에 있고 박작성은 하류에 위치해있습니다.
고구려가 박작성을 취하게 되면 압록강을 통해서 서해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해상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구요.
요동지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외진출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압록강가에서 출발한 고구려는 정복사업을 통해 급속히 팽창했다. 고구려는 철갑기마무사에 의한 기습공격과 험악한 산과 강을 이용한 철옹성에 의지해 강역을 넓혔다. 궁내성에서 압록강을 떠나 250km 지점에 위치한 박작성은 서해로 가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고구려의 해외방어체계의 핵심이었다. 호산에 고구려 박작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 기록에도 확인할 수 있다.
1991년 호산 일대를 발굴한 중국 조사단은 이 곳에서 쐐기돌로 쌓은 석축과 대형 우물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이곳에 고구려의 대형 성벽터가 있었다는 발굴 결과를 정리한 바 있다.
전 요령성박물관장 왕면후가 집필한 고구려 고성연구. 그는 1994년 호산성 일대를 조사하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중국은 이 모든 결과를 무시했다.
92년부터 이곳이 장성의 일부라며 새로운 성을 쌓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호산장성이라는 현판까지 내걸었다. 그리고 보란듯이 한글로 된 안내문도 붙였다. 주민들은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는 그냥 하나의 산이었다.
복원공사가 끝난 다음에 호산장성이라고 불렀어요.
- 류 이(83) 마을주민 -
호산장성이라는 이름은 주민들조차 생소하다.
예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나중에 장성이 만들어졌는데 이 동네가 호산이잖아요.
성이 다 완성된 후에 호산장성이라고 불렀어요. 과거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호산장성이라고 해요.
- 리샤오저(58) 마을주민 -
지도에는 어떻게 표시되어 있을까? 명대학자 이묵이 제작한 대명여지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분명한 학술적 근거가 제시되고 난 이후에 만리장성이냐 아니냐는 논의가 시작되야할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명대에 제작이 된 대명여지도이다. 보는 것처럼 만리장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있다. 서쪽 가요권에서 시작된 장성은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바로 이 곳, 산해관에서 멈춘다. 이렇듯 당대 지도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은 이 장성이 산해관을 넘어서 동쪽으로 뻗어나가다가 압록강변, 호산에 이른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과연 이들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요령성 심양시.호산장성은 무엇을 근거로 건축된 것일까? 호산성 복원은 요령성 문물연구소와 종신연구원인 풍영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호산에 정말 장성의 흔적이 있었나요?
어디든지 있어요. 사진도 있고요. 다 있었어요.
하지만 보존하기가 어려웠죠. 최근에도 보존하기가 힘들어요.
내가 34년동안이나 조사한건데 모를 리가 없죠.
- 풍영겸 ㅣ 요녕성 문물고고 연구소 종신연구원 -
그의 조사 내용은 고고학 연감에 짧게 실려있다.
이형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연감에다 1990년에 3개월 동안 발굴한 내용을 한 페이지도 제대로 안 되는 이런 약식보고서로 냈습니다.
그는 호산에서 명대장성의 석축을 발견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성을 관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풍영겸 ㅣ 요녕성 문물고고 연구소 종신연구원 :
정식보고서를 쓰지는 않았어요. 쓰려고 준비는 했었죠.
도면이라든가 기록, 사진들은 지금도 다 있어요.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자료가 비교적 많아요.
제작진은 그의 저서에서 어렵게 호산의 발굴사진 몇 장을 찾아냈다.
동서로 뻗어있는 고구려 성벽과 명나라 것이라고 주장하는 남북방향 석축은 그 형태에 있어 다를 바가 없다.
어떤 학술적 근거나 자료조차도 제공하지 않은채 중국은 호산에 장성 복원을 시작했다.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그 주변에서 석축렬이 죽 나왔는데 이 석축렬을 중국 학계는 만리장성 유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학술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단정하고서 그 석축 위에 벽돌로 만리장성 관련 유적을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가 발견한 것이 명대 만리장성이 맞다면 신축한 만리장성의 끝부분에도 이와 이어진 석축이 있어야 한다. 연장공사를 앞두고 있는 신축장성의 끝 지점. 도로 건너편에 성벽의 하부 구조가 있는지 확인해봤다. 만리장성이 연결되어 있었다면 의례 있어야 할 석축이 발견되지 않는다. 능산을 따라 약 5km를 탐사했다. 호산에서 뻗어나온 만리장성의 석축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북쪽으로 산성이 이어져야하는데 보시다시피 누각 뒤에 산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 학자의 저서에서도 호산에는 산성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현 장성학회의 회장인 화하자, 그는 자신의 저서에 호산 인근에는 장성이 없다고 기록했다.
압록강과 애하에 접한 호산에는 산 위나 아래 어느 곳에도 장성의 유적은 없다
- 장성학회 화하자 -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지난 1990년대 초에 이 호산성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합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대형 유물이 나왔고 석축 시설들이 일부 나옵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석축시설을 가져다가 명나라의 만리장성 유적이라고 해설해서
이렇게 벽돌성으로 둔갑을 시켜놓은 것입니다.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옛 성벽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호산성. 중국의 근거없는 해석과 졸속복원으로 호산의 고구려성은 만리장성으로 둔갑해 1500년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중국은 호산에서 만리장성의 유적을 발굴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학술적인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없이 예산을 투입해 서둘러 장성 신축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후 장성 개념에 대해 이전과는 또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 하북성에 위치한 산해관. 명을 건국한 주원장의 명령으로 1381년에 지어졌다. 명나라는 연산산맥을 따라 성을 이어 장성을 축조하고 산해관에 군사를 배치해 북방에서 내려오는 몽골의 침입을 막았다.
장예린 ㅣ 장성 박물관 연구원 :
산해관은 서기 1381년 대장군 서달이 쌓은 성입니다
1368년 주원장은 몽골족이 세운 원을 밀어내고 대륙을 통일한 후 명을 건국한다. 원나라는 명에 쫓겨 북방의 초원지대로 후퇴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몇 차례 북방정벌을 단행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1449년 급기야 하북성 토목에서 명의 정통제가 몽골족에게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의현 교수 ㅣ 강원대학교 :
최대의 적인 몽골을 방어하기 위한 명의 방책은 방어선을 쌓는 것이었고
요동 변장이라고 하는 대대적인 방어선을 쌓는 것이었죠.
요동 변장은 명이 산해관에서 압록강변에 이르는 지역에 목책과 토담, 석축등을 혼용해 구축한 방어선이었다.
이것은 작년 말 중국이 새로 주장한 명대 신만리장성의 구간과 일치한다.
서영수 교수 ㅣ 단국대학교 :
변장은 장성과 좀 차이가 있는데 장성은 쭉 연결해서 쌓은 것이고
변장 중의 일부는 보루성이나 특수한 지역에 성을 쌓는 것이기때문에 연결된 장성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요동에 관련된 고문서를 집대성한 요해총서에 따르면 요동 변장은 18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이 중 마지막 구간인 봉황산에서 압록강변까지는 목책으로만 경계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구간은 호산성이 위치한 지역이다. 요동변장은 압록강으로 오다가 중도에 연천변에서 서게 된다. 그림 형태가 틀리고 연천변에서 압록강까지는 자연적 험새를 이용해서 군사 거점을 세운다. 이것은 전초기지고 전초기지가 끝나는 부분이 압록강 부분이고 지금의 동덕기점이라고 보는 호산산성이다.
중국 학자들은 장성의 개념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만리장성에 대한 연구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장성사라는 책에서는 목책은 장성이라 부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요동변장의 마지막 구간인 봉황성 입구. 지금은 작은 장터가 들어서있다. 그런데 이곳에 변문이라는 이름을 단 상점이 많다. 변문은 무엇일까?
변문은 봉황성 입구에 있던 명과 조선 사이의 일종의 관문이었다. 변문이 있던 구간은 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비무장지대. 사신들의 사행길이자 국제적인 무역거래소였다. 이 봉황성이라고 하는 지역은 실제로 조선의 사신이 명의 땅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 즉 책문이 설치된 지역인데 양국간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고 명으로 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명과 조선의 국경 완충 지대의 성격이 강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봉황산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곳에는 군사시설이 구비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기위한 조선과 명 양국의 합의이자 배려였다.
요동의 동쪽 180리는 넓고 비옥한 땅이다
그 땅이 비어 있음은 양국의 국경이 서로 섞이지 않게 함이다
호산성이 있는 요동 변장의 마지막 구간, 그곳은 양국의 정치력과 군사력이 미치지 않는 빈 공간이었다. 그곳에 적을 방어하고 때로는 공격하기 위한 만리장성은 없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제작이 된 해동지도이다. 보는 것처럼 목책에 선명한 실체가 보인다. 나무 말뚝을 연이어 박아 만든 경계선, 바로 이것이 목책이다. 헌데 이것은 여러 군사 시설을 탄탄한 성벽으로 이어서만든 장성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이것마저도 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확장 움직임은 이 뿐만이 아니다. 작년 12월에는 만리장성이 고구려의 심장부까지 들어왔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이 위치한 환인. 환인에서 백여킬로미터 떨어진 통화시 외곽 혁신동 산 위에 고구려의 성이 있다. 자안산성은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국내성을 향하고 있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왼쪽으로는 혼강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한미라고 해서 삼각점이 있습니다.
삼각지점에서 해발 200m 이상의 고지인데 동쪽으로는 약 1.1km의 동벽이 수직으로 깍여있습니다.
자안산성은 국내성 방어의 거점으로 고구려의 수도권 방어체제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중국은 이곳 인근 통화현에서 한나라 시대의 만리장성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길림성에서 실시한 유적 조사 중 진한시대 장성의 유적 4곳을 발굴했습니다
남대자 옛 성터 등 4곳이 진한산성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 결과에 따르면 감숙성 옥문관에서 란주로 다시 내몽고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한나라 시대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신빈에서 통화로 10km 남짓 연장된다.
통화현 싼커위수진 마을 0.5km 지점. 한나라 시대 만리장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남태고성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마을에서 옛 성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남대자 성터의 발굴 현장을 찾아볼 수 있다.
진퉁아 (68) 마을주민 :
바로 여기가 작년에 발굴한 자리입니다
작년 6월에 발굴을 했습니다. 다 가져가고 땅을 덮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에 돌이 많았습니다. 전부 돌이었고 저쪽은 전부 붉은 흙이었습니다.
북쪽 성벽이 있었던 지점, 흙으로 쌓은 축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토축의 높이는 약 6m에 달했다. 성벽 주위로는 물이 흐른다. 적의 공격을 막는 해자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성벽 한켠에는 적을 감시하는 망루 터가 남아있다. 유독 망루 주변에 집중된 돌들. 군사시설은 돌을 이용해 쌓았다. 동서 길이 36m, 남북 48m 비교적 작은 규모의 성이었다.
발굴 당시 이곳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근거로 한나라 시대 장성임을 주장하고 있다. 남대자성터에서는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하지만 인근 마을에서 이 성을 부르는 이름은 다르다.
저기가 고려성입니다.
1986년 발행된 통화현 문물지는 남대자성의 발굴 결과를 담고 있다. 학자들은 이곳을 고구려가 방어를 위해 건설했다고 적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그 형태로도 장성이 될 수 없다. 남대자성은 평지 위에 세워진 방형토성이다.
공석구 교수 ㅣ 한밭대학교 :
그 지역에 가보니까 남대자고성이라고 하는 성곽이 있었는데 평지에 쌓은 방형토성입니다.
장성이라고 한다면 한쪽의 적을 막기 위해서 쌓는 것인데 그래서 일직선으로 나아가게 되죠.
하지만 남대자고성은 방형토성인데 사방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죠.
만리장성 관련 유적이라고 하기에는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남대자성을 인근의 적백송 성터와 연결시켜 한나라 시대의 장성 일부로 보고 있다. 남대자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적백송 성터. 총 둘레 976m 남아있는 성벽의 평균은 4.8m로 남대자성과 유사한 방형토성의 형태이다. 이곳에서도 기와와 토기, 청동 등 한나라 시대와 그 이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이쪽에서 한씨에게 유물이 나오면 한나라 때의 유물이고 한의 성이고
한으로 연결시켜서 장성이라고하는데 이 성 뒤에 어느 곳에도 장성의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중국은 이곳의 유물을 근거로 한나라 시대의 고도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만리장성이라고 할 만한 성의 연결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영수 교수 ㅣ 단국대학교 :
평지성들이 드문드문 몇개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장성이라 볼 수 없고
최근에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쭉 연결해서 한대 장성이 통화지역까지 갔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왜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통화 지역은 환인, 집안과 함께 고구려의 발행지이다. 하지만 한대 만리장성이 통화까지 미쳤다는 중국의 주장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왜곡하려 했던 동북공정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요동 지역에 있는 다른 고구려성들은 어떨까? 긴급히 진단해보았다.
요동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고구려 비사성. 비사성은 해발 666m의 위치한 대흑산 절벽 위에 있다. 고구려군은 이곳에서 요동반도를 감싼 발해만을 조명하며 수나라, 당나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 가장 중요했던 가장 먼저 방어했던 성이죠.
이게 함락되면 고구려가 함락되는 겁니다.
해양 방어의 최전선이라는 사명감으로 하나 하나 쌓아올렸던 성벽. 하지만 1500년이 지난 지금 성벽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옥수수 알처럼 볼록하게 깍은 고구려의 쐐기돌은 성벽의 하단 일부에서만 드문드문 보인다. 아무렇게나 쪼갠 활석과 고구려의 쐐기돌이 뒤섞인 성벽. 중국은 성벽을 복원한다면서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 잡석을 채웠다. 성벽 아래 경사면에는 고구려 쐐기돌이 흩어져있다.
성벽 밖으로 돌출되어 적을 삼면에서 공격했던 치. 중국은 4,5m에 이르는 치를 2,3m도 안되게 축소해 복원했다. 성의 장군이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에는 중국식 누각이 들어섰다. 점장대의 현재 이름은 옥황전. 콘크리트로 지은 도교사원에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다.
성의 입구, 비사성이라는 이름대신 중국 지명을 딴 대흑산산성이라는 이름이 쓰여져있다. 관문 앞에 자그맣게 쓰여져있는 비사성이란 글씨는 색깔마저 바래 눈에 띄지 않는다.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 끝에는 지금도 군부대가 들어서있다. 성 안으로는 군용도로가 관통한다.
비사성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대형 사원이 들어서있다. 당태종을 모시는 당황전. 당태종이 이곳에서 병을 치료하고 군을 지휘했다는 후대의 말에 따라 만든 건물. 그러나 당태종은 비사성에 온 적이 없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후대에 당나라 벽화나 건축 양식을 가지고 복원한 것 같아요.
여기에 절이 있었다거나 궁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어요.
비사성을 따라 동쪽 160km 지점에 위치한 성산산성.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철옹성이다. 내성에는 사령부격인 장대와 병영등 주요 군사 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다. 요동의 산성은 고구려 방어체계의 핵심이었다. 광개토대왕 시설 요동을 장악한 고구려는 요하 요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함락에 대비해 2차 방어선을 쌓아 수도를 보호했다.
성산산성은 비록 일부 구간이긴 하지만 일대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고구려 성벽을 보존하고 있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그런데 여기보면 조금 깍았어요.
이 지대석을 깍았다구요.
고구려성은 돌 하나하나를 짜맞추듯 깍아서 쌓았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밑에가 집안석이고 이 돌도 모진 부분을 아주 부드럽게 깍았어요.
성벽보다는 성 안에 있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줄임을 합니다.
이건 굽두리 양식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20cm, 위로 가면 15cm 씩 들여쌓기를 했는데 성벽은 이렇게 쌓으면 안되요.
모줄임 기법은 건물이나 성벽을 쌓을 때 쓰던 고구려 특유의 건축양식이었다. 치열한 전쟁의 순간 속에서도 성안에 아름다움을 들일 줄 알았다.
연개소문이 머물며 작전을 지휘했던 비사성. 하지만 군사들이 당군을 살피던 조망대에는 중국식 누각이 올려졌다. 이름조차 요망대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내성 안쪽에 자리잡은 병영 유지에도 중국식 건물이 들어서있다. 형태만으로는 영락없는 중국성이다.
지휘 통제소인 점장대. 중국식으로 올린 누각은 콘크리트로 지어 흉물스럽게 변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기둥 여기저기에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다. 성의 서쪽은 성벽마저도 훼손되었다. 쐐기돌이 빠져나간 성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짜맞춘 듯 아름답고 견고하던 고구려의 성벽은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이름 봉황성으로 더 유명한 고구려의 오골성. 이 성의 유일한 관문인 남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훼손되어 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쐐기돌만이 고구려의 성벽임을 알려준다.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여기는 봉황성인데요. 봉황산성은 고구려때 가장 큰 성입니다.
둘레가 16km, 모든 산의 둘레가 산으로 쌓여있는데 여기 남문만 유독 터져있습니다.
남문에 높은 20m 이상의 높은 성을 쌓고 성을 막는데 여기만 막으면 안심하고 살 수 있죠.
여기에는 한 10만명이 살았다고 하니까 그만큼 거대한 성입니다.
흙더미로 남은 남문은 그나마 반쯤 잘려있다. 군부대가 생기면서 남문 쪽을 절단한 것이다. 산등성 위에 위치한 장대. 쐐기돌을 품자형으로 쌓은 전형적인 고구려 유적이다. 하지만 이 또한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파손되어 있다. 중국의 지방 정부는 군데군데 잡석을 모아놓고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벽면 한쪽으로는 치가 무너진채 방치되어 있다. 오골성은 적군의 침입에 대비한 독특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문이 있던 자리에는 내려앉은 돌무더기 사이로 둥그렇게 돌려쌓은 옹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골성은 지형과 기술을 결합한 요동 최고의 방어 진지였다.
고구려 천리장성의 한 축이었던 백암성. 요양시 동쪽 30km 지점 등파편에 백암성이 있다. 태자하를 끼고 200m 높이에 구축한 철옹성.
인근에서 나는 석회석을 이용해 석회암을 이용해 쌓아 백암성으로 불린다. 요동 평원에서 평양성으로 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한 거점성. 하지만 무너진 성벽은 복원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동 지역을 방어하던 요충지 백암성. 하지만 이곳에서 백암성의 이름은 사라진지 오래다. 연주성 산성이 백암성을 대신하고 있다.
Q. 어느시대 성인가요?
A. 당나라성, 연주성이다.
Q. 누가 지었죠?
A. 설인귀 장군이요. 수양제가 이곳에서 전투를 했었죠. 당태종도 여기서 전투했어요.
수양제는 실패했지만 당태종은 성공했어요. 화공으로 성공했어요. 기록에 다 나와 있어요.
Q. 당태종은 여기서 누구와 전쟁을 했죠?
A. 이 지역의 소수 민족이었겠죠.
이형구 교수 ㅣ 선문대학교 :
중국 문화계에서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리고 관광자원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유적 안에 있는 건물지라든가 성벽을 많이 보수하고 복원하는 것을 봤어요. 자기네 영토 안에 있는 문화유적이기 때문에 자기 역사라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난 2004년 중국은 국내성과 오녀산성 등 고구려 유적을 북한과 함께 유네스코 유산에 공동 등재했다. 이를 위해 국내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던 중국. 이후 고구려 유적을 도시를 홍보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1987년 만리장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던 중국. 만리장성 연장이 중국의 주장대로 공식화된다면 그 속에 묻힌 박작성 또한 그대로 중국사가 될 수 있다.
지오바니 보카르디 ㅣ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센터 아태지역 팀장 :
어떤 국가가 자기 영토에 속한 문화유산을 등재, 신청할 경우 이 유산이 과거에 다른 국가의 것이었단 사실은
세계문화유산협정의 차원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요동지역 고구려성의 훼손과 왜곡은 문화유산보호의 차원을 넘어 역사왜곡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고구려의 심장부까지 파고드는 만리장성 연장 논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음모 속에 요동의 고구려사는 흔들리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땀과 지혜로 건설했던 요동 지역의 고구려성들은 현재 중국인들에 의해 중국식으로 변해가거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훼손된채 방치되어 있다. 만리장성 확장이라는 명분하에 짓밟히고 있는 우리 고구려사.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요동 지역에 고구려사는 왜곡되고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할 때 우리 역사의 진실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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